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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자전거 여행』 – 느림과 사유의 아름다움”

by 필사의 하루 2025. 5. 14.

 

점심을 마치고 산책겸 돌아오는 길, 유난히도 선명한 하늘과 바람 덕분에 문득 떠오른 책이 있었습니다. 바로 김훈 작가의 『자전거 여행』입니다. 단지 ‘여행 에세이’라고 부르기엔 이 책은 훨씬 더 깊은 세계를 품고 있습니다. 자전거라는 느린 이동 수단을 통해, 한국의 공간을 몸으로 읽고, 삶의 속도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이 책은 인문학적 사유가 깃든 여정 그 자체입니다.

 

작가 김훈, 문장으로 사유하는 작가

김훈 작가는 기자 출신이자 소설가로,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 역사와 인간을 응시하는 깊이 있는 작품들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사건을 기록하던 기자 시절의 시선과 문학적 사유가 결합된 독특한 문체로 독자들을 매료시켜 왔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그의 문장은 때로는 날카롭고, 때로는 고요하게 우리 삶의 본질을 찌릅니다. 『자전거 여행』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과 태도가 가장 밀도 있게 담긴 산문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길 위에서 완성된 문장,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

이 책에서 김훈은 자전거를 타고 국도를 따라 이동하며, 자연과 인간, 문명과 폐허, 도시와 시골의 경계를 관찰합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풍경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길 위의 풍경 속에서 인간 존재를 성찰합니다. 버려진 간이역, 폐교된 초등학교, 텅 빈 국도 한가운데에서 그는 끊임없이 “나는 어디쯤 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가 쓰는 문장은 책상 위에서가 아니라 몸으로 쓰여진 문장입니다. “내가 직접 페달을 밟지 않으면, 그 길은 나의 문장이 될 수 없다.”는 그의 말은, 글쓰기란 삶을 직접 통과하는 일이라는 작가의 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그런 점에서 『자전거 여행』은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하나의 철학적 체험입니다.

속도를 줄이면 보이는 것들

김훈은 자전거라는 '느린 속도'를 통해, 자동차로는 놓치고 지나치는 풍경을 다시 포착합니다. 인문학이란 결국 ‘낯익은 것에 질문을 던지는 일’이라면, 이 책은 너무나 당연했던 풍경과 길에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왜 이 길은 외면당했는가, 왜 우리는 이 풍경을 잃었는가. 그는 풍경의 ‘미학’보다 풍경에 담긴 ‘시간과 기억’을 중시하며, 그 안에서 한국 현대사의 흔적과 인간의 정서를 포착해냅니다.

문체, 침묵과 여백의 미학

김훈의 문체는 짧고 단단하며, 때로는 무심한 듯 건조합니다. 하지만 그 건조함은 오히려 독자의 사유를 자극합니다. 많은 설명 없이도 문장 사이의 여백에서 독자 스스로 의미를 끌어내게 합니다. 그의 문장은 마치 한 줄의 도로처럼 이어지며, 독자는 그 길을 따라 조용히 걷습니다. 감정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강력한 여운을 남기는 문장. 그것이 김훈 글쓰기의 미학입니다.

이 책이 필요한 순간

  • 빠르게 돌아가는 일상에 지쳐, 잠시 호흡을 고르고 싶을 때
  • 자연을 단순한 풍경이 아닌 '의미 있는 공간'으로 바라보고 싶을 때
  • 인문학적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 독자, 작가지망생, 비평가

“빠름이 미덕이 된 시대, 우리는 무엇을 잃었는가?”
김훈은 이 책에서 속도를 줄이고, 멈춰서고, 돌아보는 시간을 권합니다. 인문학의 가장 본질적인 물음은 결국 삶의 속도와 방향에 대한 자문이 아닐까요. 『자전거 여행』은 단지 여행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속도로, 어떤 시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되묻는 책입니다.
점심 산책길에서 불현듯 떠오른 이 책때문에 퇴근하고 싶어졌습니다. 얼른 집에가서 펼쳐봐야겠습니다. 풍경을 보고, 삶을 돌아보고, 문장을 곱씹게 하는 힘.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그런 책입니다. 햇살 좋은 오후, 마음 한편이 허전하다면 이 책 한 권으로 조용한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시기를 권합니다.

[분류 전체보기] - 김훈 『연필로 쓰기』 – 문장을 짓는다는 것, 살아낸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