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8권을 필사가 막바지에 이르던 밤, 나는 필사하다 말고 한참을 멈춰 있어야 했다. 그 장면을 쓰는 내내 마음이 무너졌고, 문장을 따라 쓰면서 결국 눈물을 쏟고 말았다. 월선이. 그녀의 마지막이, 그녀의 기다림이, 그녀의 사랑이 너무도 가슴 아팠다.
책을 읽을 때도 마음이 아팠지만, 필사는 다르다. 문장 하나하나를 손으로 옮기는 동안, 나는 그 인물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번 권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장면은 월선이의 죽음, 그리고 용이와의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용이가 도착할 때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끝까지 기다린 것이다. 끝까지 사랑한 것이다.
인물로 읽는 『토지』 – 월선이라는 존재
월선이는 『토지』의 많은 인물들 중에서도 유난히 조용한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상처받은 과거를 지녔지만, 드러내지 않았고, 아프다는 말도 쉽게 하지 않았다. 늘 남을 배려하고, 물러서며,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가장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법이다.
용이를 향한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표현하지 않아도, 말로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단 한번을 오지않는, 돌보지 않는 용이를 원망하지 않고, 그의 아들 홍이를 곁에 두고 안아주던 그 마음이 진심이었기에, 그 사랑이 절절했기에, 그녀의 죽음은 더 아프고 더 슬펐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월선이는 용이를 기다렸다. 숨이 끊어질 듯한 그 고통 속에서도 그 사람만을 기다린 것이다.
월선이의 죽음을 읽고 필사하며
내가 손으로 옮겨 쓴 문장 중 가장 오래 눈에 머문 문장이 있다.
“임자..”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용이와 월선의 마지막을 쓰며, 도저히 눈물을 참을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 감춰온 마음, 고통스러운 삶, 그리고 오로지 한 사람만을 기다리며 살아낸 여인의 마지막. 그녀가 진심으로 원했던 건, ‘그 사람’이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와주는 것이었다. 그 바람 하나로 견뎌온 삶이었다. 용이가 돌아와서 이틀 밤을 지탱한 월선은 정월 초이튿날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
월선이의 눈물 같은 말은, 나의 손끝에서도 울음을 머금었다. 필사는 단순히 글자를 옮기는 일이 아니었다. 그 문장 속 감정을 함께 꺼내어, 나의 내면 깊은 곳에 쌓아두는 일이었다. 그게 내가 책을 읽는 방법이고, 문장을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용이와 월선이, 그리고 홍이
8권에서는 용이의 고뇌도 인상 깊었다. 그 역시 월선이를 향한 마음을 숨기고,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뒤늦게 그녀를 찾아왔지만, 그녀는 이미 삶의 끝자락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용이가 도착한 그 순간에야 겨우 눈을 감았다. 이보다 더 간절하고 가슴 아픈 사랑이 또 있을까. 월선이의 투병소식에도, 산까지 쫓아온 아들 홍이의 원망에도 가벼이 발걸음을 옮기지 않던 용이가 이해할 수 없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고,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그 마음의 무게 또한 가볍지 않았을걸 알것 같은 마지막이었다.
그 곁에 있던 홍이 또한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아프고 서글픈 사랑의 한 장면에 머무르며, 끝내 남겨진 자가 되는 슬픔. 나는 이 세 사람의 엇갈린 마음을 따라 쓰며, 문장과 문장 사이에 나의 감정을 덧입혀갔다.
『토지』 필사, 그리고 나의 하루
『토지』를 필사한다는 건 단순히 한국 문학의 거장을 따라 쓰는 일이 아니다. 나는 이 필사를 통해 한 사람의 인생, 한 시대의 정서, 그리고 나의 내면을 함께 읽어내려 쓰고 있다. 월선이의 마지막을 옮기며, 나는 이 필사가 얼마나 깊은 공감의 행위인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슬펐다.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만큼 진심으로 연결되었다는 증거였다. 필사는 마음을 따라 쓰는 일이다. 내 마음이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손도 움직이지 않는다.
끝, 그리고 다시 시작
『토지』 8권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월선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용히 웃던 얼굴, 용이가 오자 안도의 숨을 쉬며 감겼던 눈. 나는 이 장면을 필사하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 역시 이렇게 한 문장, 한 사람을 마음 깊이 써내려가는 필사를 계속해가겠다고.
오늘 아침 출근 후 토지 8권의 마지막장을 덮었다. 월선이를 보내고, 그 뒤를 가족보다도 정성스레 챙기고 난 서희는 이제 먼땅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고향으로 떠난다. 그 시간을 얼마나 준비하고 기다렸을지, 그 과정중에 잃은 것들은 또 얼마나 가슴아팠을지. 앞으로 또 서희가 감당해야 할 것들에 함께 응원이 되어진다. 힘내라 서희야!!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는, 필사를 통해 더 깊어질 수 있다. 잊히지 않는 문장들을 나만의 손글씨로 남기는 일. 그 일은 결국 나 자신을 남기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도 난 필사를 멈추지 않는다. 필사의 하루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