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이 어렵다면, 필사부터 시작해보세요 –
소설은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문학이다. 하지만 그 문을 여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한때는 소설을 어려워했다. 사건은 천천히 흘러가고, 문장은 함축되어 있으며, 말하고자 하는 바가 쉽게 드러나지 않으니 몇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손을 놓고 싶어졌다. 게다가 지금처럼 정보가 필요한 때에 소설은 무슨 소설, 하면서 하나라도 더 배워야지 라는 생각으로 자기계발서와 정보서 위주로 읽었던 때가 분명 있었다. 하지만 ‘필사’를 시작하면서 그런 마음은 조금씩 달라졌다. 그리고 그 변화의 시작엔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이 있었다.
『새의 선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다. 15살 소녀 진희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 이야기는,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한 서늘한 통과의례에 가깝다.
진희는 세상을 너무 이르게 알아버린 아이였고, 그래서 어른들이 감추려는 것들을 너무 선명하게 보아버렸다. 그녀는 다정한 척하는 말에 숨겨진 이기심을 알아채고, 보호라는 이름의 억압을 꿰뚫어본다.
그렇게 진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동안, 나도 여러 번 숨을 고르게 되었다. 진희는 자주 말하지 않는다. 대신 똑똑히 본다. 보고, 속으로 삭인다. 말 대신 침묵을 선택한 그녀의 시선이,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그런 문장들이 많다. 쓰다 보면 마음이 저릿해진다. 무심한 척, 냉정한 척 쓰인 문장 뒤에 감정이 조용히 흐른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나는 조용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선 어떤 말이 자꾸 맴돌고 있었다. 말이 입 밖으로 나가면 어쩐지 그것이 진짜가 될 것 같아서 두려웠다.”
이 문장을 필사하며 오래 머물렀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을 보호하려는 진희의 마음이, 왠지 모르게 내 마음과 겹쳐졌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다는 건, 이렇게 한 인물의 마음에 천천히 발을 들여놓는 일이다. 그리고 필사는 그 마음에 다가가는 가장 섬세한 방법 중 하나라고 나는 믿는다. 단순히 좋은 문장을 따라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을 따라 걸어보는 일. 그 안에 담긴 감정과 침묵, 결핍, 위안을 함께 나눠보는 일이다.
『새의 선물』은 특히 그런 점에서 필사에 더없이 좋은 책이다. 문장이 짧고 단정하며, 감정은 절제되어 있다. 한 줄을 쓰고 나면, 그 여운이 손끝에 오래 남는다. 문장을 손으로 옮기는 동안, 나는 그 말들이 왜 그렇게 쓰였는지를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내 마음속 어딘가를 들여다보게 된다.
소설을 잘 읽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제 “필사부터 해보세요”라고 말하곤 한다. 한 줄 한 줄 따라 써보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문장이 마음에 들어와 앉는다.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던 작품도, 그렇게 한 문장씩 쓰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먼저 달려가 있다.
특히 『새의 선물』처럼 인물의 내면이 섬세하게 그려진 작품은 필사를 통해 더 깊게 경험할 수 있다. 진희의 말과 말 사이, 그녀의 침묵과 눈빛 사이에 담긴 감정을 글로 옮기는 일은 단순한 독서 그 이상이다. 그것은 어쩌면, 나 자신을 마주하는 한 가지 방식이기도 하다.
나는 『새의 선물』을 필사하면서 내 안에 있는 작고 고요한 감정들을 자주 마주했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웠던 감정들이, 은희경 작가의 문장을 따라 손으로 써내려갈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그 경험은 그저 글쓰기 훈련을 넘어서, 마음을 다독이는 치유의 시간이 되었다.
소설은 느리게 읽을수록 더 많은 것을 준다. 필사는 그 느린 읽기를 돕는 가장 따뜻한 방법이다. 만약 당신이 지금 소설을 읽고 싶지만 잘 읽히지 않는다면, 오늘 한 줄의 필사로 시작해보기를 권한다. 필사는 어쩌면 당신에게도 ‘새의 선물’이 되어줄지 모른다.
🌿 필사를 따라 걷는 또 하나의 길
『새의 선물』이 쓰인 배경은 1970~80년대의 한국이다. 가족이라는 틀, 학교라는 공간, 종교라는 시스템은 모두 진희를 ‘길들여야 할 존재’로 바라본다. 하지만 진희는 그 안에서 스스로를 관찰하고 질문한다. 그 질문은 작지만 강하다. ‘왜 나는 이런 감정을 느낄까? 왜 이 상황에서 웃어야 할까?’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그런 질문을 소녀의 언어로 조용히 펼쳐내기 때문이다.
은희경 작가의 문장은 날카롭지만 단정하고,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속이 꽉 차 있다. 단순히 멋진 문장이 아니라, 삶의 결을 따라 조심스럽게 길을 낸 문장이다. 그래서 필사를 하다 보면 어느새 그 문장이 가진 결을 나도 함께 느끼게 된다.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조용히 꺼내 보이게 만드는 문장들. 나는 그런 문장을 좋아하고, 그 문장을 따라 쓰는 시간이 참 좋다.
필사를 할 때 나는 대단한 계획 없이 그저 책을 펼친다. 마음에 남은 문장이 보이면, 노트를 꺼내 조용히 따라 쓴다. 꼭 매일 하지 않아도 좋고, 일정한 양을 채우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나를 잠시 멈추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손으로 옮기는 글자마다 마음이 조금씩 차분해진다.
어떤 날은 진희처럼 나도 말 대신 침묵을 선택하게 된다. 어떤 날은 그 조용한 문장을 다 쓰고 나서야 비로소 내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도 한다.
소설 필사는 단순한 ‘책 읽기’나 ‘글쓰기’와는 조금 다르다. 그것은 ‘함께 살아보기’에 가깝다. 인물의 시선을 따라가고, 그 감정을 흘려보내고, 문장을 통해 나를 비추는 일. 그렇게 필사를 하다 보면, 나는 어느새 내 일상도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새의 선물』을 필사하며 내가 배운 건, 감정은 반드시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때론 쓰는 것이, 말보다 더 깊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 진희는 말하지 않지만 충분히 많은 것을 느끼고, 그걸 독자에게 고요히 전한다. 나도 그런 문장을 손으로 써 내려가며, 스스로와 조금 더 가까워졌다.
혹시 지금 당신도 소설이 어렵고 잘 읽히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너무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모든 책이 쉽게 읽힐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필사는 그 마음을 포착하게 도와준다. 그리고 그 느린 기록은 언젠가 당신에게 가장 조용하고 다정한 문장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소설이 멀게 느껴졌던 그때, 나는 필사를 통해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었다. 그리고 『새의 선물』은 그 여정의 가장 아름다운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오늘 단 한 문장이라도 써보기를 바란다. 그 문장이 당신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피워낼지 모르니까.
✍ 함께 필사하기 좋은 소설들
- 『바깥은 여름』 – 김애란
짧은 문장 속 깊은 감정. 일상 속 상실과 회복을 따뜻하게 담아낸다. - 『아몬드』 – 손원평
감정을 배우는 소년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내 감정도 함께 정리된다. - 『소년이 온다』 – 한강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지만, 조용하고 단단한 문장이 마음을 오래 흔든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꼭 ‘잘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필사는 ‘잘’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깊이’ 있기 위한 연습이다. 느리고 조용한 독서의 방식, 그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
오늘,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 날이라면 괜찮다. 그저 한 줄을 골라 따라 써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문장이 어느새 당신을 다정하게 이끌어 줄 것이다.
『새의 선물』이 그랬듯이.